태풍이 지나간 하늘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했던가. 일요일 아침 막 집안일을 시작하려던 참에 그렇게 지인 따라 길을 나섰다. 지인은 오늘 경남 함양의 황석산을 오른다 했다. 우리는 갑자기 예정 없이 나선 길이기에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닌, 그 지방의 유명한 용추계곡과 용추폭포를 구경하며 용추사까지의 드라이브 계획이었다.
늘 내 곁에서 함께하는 자연이건만 내 주위를 조금만 벗어나서 만나는 자연은 또 다른 새로움을 안겨주며 마음을 밝게 해준다. 아직 태풍의 영향권이라는 예보가 있었지만 하늘은 깨끗했다. 멋진 문양을 마음대로 그려가며 온 하늘을 차지하고 노니는 구름도 아직은 몸이 무거운 듯, 산봉우리에 제 몸을 기대고 있으니 마음이 좋은 산은 구름의 무거움을 거뜬히 나누며 멋진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누군가 말했다. 태풍은 지구가 불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 나타나 그 균형을 고루 섞어주는 일을 한단다. 하여 태풍이 지난 하늘은 더없이 깨끗하고, 바다 속은 깊게 일렁이면서 깊음과 낮음이 섞이면서 많아진 먹잇감으로 물고기들도 더 많이 잡히는 것이라 했다. 이 세상 존재하는 그 무엇들은 다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나의 오늘 느닷없는 외출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니 밀린 집안일에 걱정하지 않으려한다. 두 시간여를 달려 용추계곡 진입로에 도착했다. 몇 년 전 겨울에 찾아왔었는데 계절적인 차이일까? 그 당시의 한가함과는 달리 많은 차량들의 행렬과 사람들로 인하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계곡이 아니었다. 이 계곡 길을 따라 가며 만나는 연암 박지원선생의 기념공원을 만나고 싶었다.
연암 박지원선생은 조선 후기를 살아온 문장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선생은 가난하게 살았지만 자발적으로 벼슬에 오르지 않는다. 그의 진면목은 청나라에서 배워 온 선진문물을 생활화하면서 나라의 부흥을 꿈꾸는 북학파 학자라고 말하고 싶다. 학교에서 배운 역사의 아우트라인이 아닌, 깊이 땅을 파고 들어간 곳의 썩은 물을 갈아 치우고 싶어 한 진정한 애국자인지도 모른다. 역사의 중심에 서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개혁의 목소리를 높인 사람이다.
1791년 12월 당시 55세의 선생은 안의 현감에 임명된다. 안의는 영호남의 경계에 위치한 작은 고을로 오늘 내가 찾은 용추계곡은 안의면에 속한다. 선생은 1792년 1월에 임지에 도착하여 5년 동안 임무를 수행한다. 연암 박지원선생은 송사를 엄격히 처리했으며 아전들의 상습적인 관곡횡령을 근절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을 받으며 이는 조정에까지 알려진다.
또한 선생은 1780년에 청나라를 다녀오면서 보아온 문물 중 베틀, 양수기 등의 농기구등을 만들어 실용화 하였으며 이곳 안심마을에서 최초로 물레방아를 만들어 사용케 했다는 것이다. 선생은 당대의 문필가였지만 또한 농경문화의 선구자로써 농촌의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개선해 나간 위정자였기에 이곳 안의는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연암 물레방아 마을과 연암물레방아 공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사실 이 공원과 마을은 어쩌면 관광지로서의 역할일 뿐이다. 이에 조상님의 음덕으로 시너지효과를 얻어 마을의 경제력을 향상시켜 주고 있는 것이라 믿고 싶다. 나 역시 오늘 이곳 안의를 찾아와 아름다운 풍경을 접해보는 음덕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좋은 조상님의 선행은 이토록 길게 이어지며 본을 보여주고 있음이니 과거의 영웅을 본받아 미래의 영웅을 길러 정말로 살기 좋은 우리나라가 되기를 빌어본다. 충분히 이유 있는 나의 작은 바람 일 것이다.
▲ 진안마이산 휴게소에서 바라본 마이산
(왼쪽 수마이봉, 오른쪽 암마이봉)
▼ 연암물레방아마을
▼ 연암물레방아공원
▲ 연암선생의 동상
사진으로 본 모습과 많이 다른 것 같음
▲ 사위질빵
▲ 확에서 자라는 거북꼬리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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