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지사 나서는 길이라면 조금 일찍 서둘러 유익함을 많이 취하자는 생각을 늘 지니고 행동한다. 오전 8시쯤부터 시작한 치악산 산행은 오후 2시를 조금 넘어 마무리 지었다. 곧바로 원주시로 향했다. 박경리문학공원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내가 박경리님을 처음 알게 된 때는 고등학교시절 소설 ‘김약국의 딸들’과 ‘파시’를 연이어 읽으면서다. 지금은 줄거리를 거의 잊었지만 읽을 때 그 감정과 읽고 나서의 아릿함 등에 퍽이나 깊은 감명을 받았음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박경리님에 대해 우리 한국문학사의 거장이라는 표현은 너무 진부할까? 작가는 통영에서 태어나 자라고 1970년대부터 강원도 원주에 살다 돌아가셨다. 원주에서 토지 4,5부를 집필하셨다 한다.
25년에 걸쳐 완성했다는 토지를 책으로, 드라마로 접하면서 관심의 골은 깊어만 갔다. 토지의 배경이 된 하동 평사리를 수 회 다녀왔으며, 통영에 갈 때면 늘 마음속에 자리한 김약국은 어디에 있었을까 마음 배회를 하곤 했다. 단순히 책을 읽었다는 마음만으로도 이러할진대 문학의 배경이 되는 곳에 사는 사람들의 자부심은 얼마나 자랑스러움으로 가득할까. 정말 대단하다.
통영은 통영대로, 하동의 평사리는 평사리대로, 이곳 원주는 원주대로 박경리 작가님의 흔적을 꼬옥 붙잡고 자랑을 하고 있다. 실로 문학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새삼 느끼며 문학공원을 찾았다. 이곳 원주의 문학공원은 작가님이 살아 지내시던 옛집과 정원, 집필실 등을 원형으로 보관하였으며 주위에 토지의 배경을 테마공원으로 조성해 놓았다.
이곳에 와 보기 전, 원주에 사신다는 말만 듣고 첩첩산골 산중인 것처럼 인식 되었는데 원주시내에 있는 아담한 현대식 집이었다. 내가 찾아간 날에는 옛집의 내부는 공개하지 않았다. 마당에 선생님의 동상이 있었고 옆으로 자그마한 텃밭이 있었다. 호박이 달려 있었고 고추가 자라고 있었다. 참 소박한 풍경이었다. 책을 읽지 않고, 작가의 집이라는 선입견 없이 만난 곳이라면 그저 평범함을 느꼈을 그런 공간이었다.
나는 이 평범한 공간에서 책 속의 깊고 깊은 주제를 살려내셨다는 그런 특별함을 만나러 온 것이다. 절대 지나칠 수 없는 그런 마음이었다.
▲ 문학의 집에 오르는 계단 끝에 자라는 쪽동백이 탐스럽게 열매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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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선생님의 일상과 삶의 자취, 그리고
평생에 걸쳐 집대성한 문학의 자취를 모두 느낄 수 있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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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와 함께한 소녀시절의 박경리 선생
▲ 선생은 평소 바느질을 즐겨하셨으며 당신의 옷도 직접 만들어 입으셨다고 한다.
▲ 선생이 직접 나무로 조각한 여인상
예술방면에 다분한 소질을 지니신 선생님이셨다.
▲ 직접 만들어 입으셨던 옷.
평소 옷을 넉넉하게 입으셨는데
이는 유방암 수술 후의 모습을 가리고 싶으셨던 마음이시라고...
▲ 친히 사용하셨던 필기도구
▲ 늘 옆에 두고 보신 국어사전과 돋보기
▲ 삼층에 전시된 선생의 책
▲ 선생이 살으셨던 집
▲ 선생님 곁에 앉았지만
에구~ 먼 곳만 바라보시네~~
▲ 친근한 어머니 같은 모습이시다
▲ 텃밭 앞에서
▲ 창 안의 풍경이 궁금했지만....
▲ 홍이동산
▲ 나무 사이로 보이는 집이 참 정겨워 보인다.
선생의 남편 김행도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 죽음을 맞았으며,
그와의 사이에 외동딸 김영주를 두었다.
김영주는 1973년 시인 김지하와 결혼하였으며,
현재 토지문화재단 이사장과 <토지문화관> 관장직을 맡고 있다.
▲ 홈페이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