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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따라 발길따라

치악산 구룡사

물소리~~^ 2014. 6. 17. 13:58

 

 

 

 

 

▲ 구룡사 대웅전

 

 

   우리나라의 명산은 어느 곳을 막론하고 사찰 하나씩을 끼고 있다. 그 옛날 그 시절에 어떻게 이런 험준한 곳에 사찰을 지었을까하는 의구심은 만날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하여 산 정상에 이르는 길도 사찰을 왕래하는 길부터 시작했기에 사찰은 산행 시 중요한 표시점이 되고 있다. 우리의 사찰은 국가적으로 인정했던 민족종교로서 역사적 배경이 함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사찰이 위치한 곳을 그 산의 최고의 명당자리라 일컬음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는 원리를 과학적으로 적용해 선정한 곳이라는 설이기도 하다. 거대한 산을 하나의 생명체로 보고 그 생명의 원리를 따라 조화를 이룬 건축물이기에 스쳐 지나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곳인지도 모른다. 역시나 치악산을 오르기 위한 들머리는 구룡사였다.

 

매표소부터 구룡사까지의 길은 그야말로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굴참나무, 단풍나무, 층층나무 등의 우람한 나무들이 내려주는 서늘함과 수량은 적었지만 졸졸 흐르는 계곡에서의 맑은 물소리는 이 길을 명품 길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구룡교에 이르니 다리 양쪽 귀퉁이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조각상이 다리를 지키고 있다. 그 옆으로 거북상도 있었는데 그 거북은 계속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곳 구룡사의 절 이름은 한자로 龜龍寺이다. 이전의 이름은 九龍寺였다. 이름 하여 천년 고찰 구룡사에 어찌 전설이 없을 수 있겠는가!!

 

구룡사는 신라 문무왕 8년(668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절로 그 오랜 역사에 걸 맞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지금의 대웅전 터에는 용 아홉 마리가 살고 있는 큰 연못이 있었는데, 의상대사가 용을 쫓아내고 연못을 메워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해서 구룡사(九龍寺)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치악산에서 나는 나물을 대부분 사용했고 그 나물의 공납책임자는 구룡사의 주지스님이었다. 하니 주민들은 자신들이 채취한 나물들을 궁중에 공납하며 높은 가격을 받기위해 절에 뇌물을 주곤 했다. 이에 절은 물질적으로 매우 풍요로워 졌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스님들의 정신력을 앗아갔다.

 

하여 정신적으로 늪에 빠진 절이 차츰 쇠퇴하자 '절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스님들은 거북바위를 부수며 절의 번창을 기원했건만 오히려 신도가 더 줄어들고 명성이 사라지고 있었다. 급기야 절이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도승 한 분이 나타나 주지스님에게 절의 운을 지켜주는 거북바위 혈맥을 다시 이으라며 절 이름을 바꾸라 하였다. 하여 절 이름의 아홉 '구(九)'자 대신 이미 파손된 거북바위의 거북을 뜻하는 '구(龜)자'를 써서 구룡사(龜龍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구룡사의 창건설화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안겨준다. 높은 도력을 지닌 의상대사는 용마저 물리칠 수 있는 자신의 힘을 과시했는지도 모른다. 분에 넘치는 물질적인 욕망에 빠져 거북바위를 부숴버린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말았다. 자만과 욕심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피폐함을 잊지말라는 말없는 진실이 가득한 길을 걸으며 구룡사에 닿았다.

 

 

 

▲ 구룡사 가는 길의 마지막 주차장

옆 몇몇의 상가에서는 김밥을 쌓아놓고 산객들을 부르고 있었다.

 

 

 

▲ 구룡사 매표소

 

 

▲ 구룡사 까지 잘 생긴 소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간다.

 

 

 

▲ 소나무 연리지

참 애처로운 모습이다.

 

 

▲ 탐방센터의 지붕이 이색적이어서 사진을 찍었는데

옆의 물을 뿜는거북상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게 찍혔다.

 

 

 

▲ 구룡교 양 옆을 지키는 용

그런데 용의 뿔이 사슴뿔만 같으니.. 어째 웃음이 나온다.

 

 

▲ 구룡사 일주문

 '원통문' 이라는 편액이 특이하다

 

 

▲ 구룡사 부도전

 

 

 

 

▲ 울창한 나무들이 즐비한 길

 

 

 

 

▲ 잘 생긴 금강소나무의 우람한 자태

 

 

 

 

▲ 구룡계곡

 

 

▲ 구룡소

용들이 놀았다는 곳

 

 

▲ 국사당

 

 

▲ 구룡사를 에워싼 나무들

 

 

▲ 수령 200년 된 은행나무

 

 

▲ 구룡사에는 쑥쑥 올라선 잣나무, 전나무 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

 

 

 

깊은 산속인 만큼 고즈넉한 분위기를 상상했으나 소란스러웠다. 오랜 역사를 지닌 천년고찰 구룡사는 전쟁과 화재 등으로 수차례 증수한 까닭에 예스러움을 찾을 수 없었다. 그에 또다시 불사가 한창 진행 중인 구룡사에는 기계음으로 가득하였다.

 

이곳 구룡사가 천년고찰임을 증명해주는 것은 대웅전의 닫집, 대웅전 앞의 당간석, 보광루의 주춧돌과 보광루에 깔았던 짚 멍석이라고 하였다. 인부 3명이 석달 동안 짰다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짚 멍석을 공사관계로 볼 수 없었음이 크게 아쉬웠다.

 

▲ 구룡사 사천왕문과 보광루

 

 

 

▲ 사천왕이 들고 있는 악기?

큰 체구에 조금은 어울리지 않으니...

번뇌로부터 중생을 지켜주는 일을 한다는데, 하여

번뇌에게는 무섭고 두려운 존재여서 무서운 형상이라는데

악기를 들고 있으니 이 구룡사의 사천왕은 마음이 순한가 보다.

꾸벅 인사를 하고 통과하였다.

 

 

 

 

 

 

 

▲ 보광루 아래를 지나 대웅전에 이른다.

 

 

 

▲ 보광루 자연석 주춧돌

 

 

▲ 대웅전

이 자리는 연못이 있었고 용 아홉마리가 살았다는 자리라 하였다.

특히 대웅전 안의 닫집은

못 하나 쓰지 않고 나무를 깎아 세운 것으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닫집 : 궁궐 안의 옥좌 위나 법당의 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

 

 

▲ 대웅전앞의 삼층 석탑

후세에 세워진 탑으로 혹자는 이 탑의 크기가

대웅전에 어울리지 않는 크기라 말한다.

 

 

▲ 범종각

 

 

 

▲ 당간석

 

 

 

 

▲ 보광루에서 바라본 치악산

 

 

▲ 미륵불

 

 

▲ 구룡사를 뒤로하고 나오는 길

잘생긴 잣나무에서 자라는 은행나무가 생소하다.

 

서로 어울려 살아감도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공자같은 몸짓언어로 일러준다.

 

이제 치악산을 올라야 한다

치를 떨며 악을 쓰고 올라야 한다는데 든든한 응원으로 우리를 배웅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