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주 훌륭한 화가는 아니다. 나는 아마추어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계절마다, 날마다 그리고 시간마다 변하는 이 골짜기의 모습, 저 평지의 굴곡과 호숫가의 형태와 풀밭 사이의 구불구불한 길을 나만큼 잘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나처럼 그 모든 것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이 저녁 시간 동안, 내가 마을 위 산자락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이 찬란하고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삶을 바라보는 관객이나 관찰자가 아니다. 나는 그들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으며 그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뭔가 갈망하는 어린아이처럼 의연히 내 행위에 몰두하고 내 놀이를 사랑하는 것뿐이다.
- 헤르만 헤세의 <화가 헤세> 중에서 -
눈을 뜨니 5시 43분이었다. 산책 시간을 놓쳤다. 무엇이 그리 고단했을까. 달콤한 잠의 여운이 못내 아쉽다고 여겨질 즈음 번뜩 한 생각이 떠오르며 나를 벌떡 일으켜 세운다. 아, 어제가 음력으로 보름!! 오늘 새벽하늘에 보름달이 환할 텐데… 만나지 못했구나 하는 마음으로 베란다에 나서니 둥근 달이 나를 반긴다.
두툼한 옷차림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식사준비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니 잠깐이나마 아파트 광장이라도 한 바퀴 돌 심산이다. 훅 끼쳐오는 싸늘한 바람결이 상쾌하다. 두어 시간 있으며 서쪽으로 넘어가는 달이지만도 서운함 내색 없이 환한 모습에 내 마음은 절로 맑아진다.
늘 바라보는 모습이지만 언제나 새로움을 안겨준다. 오늘처럼 모자람 없는 둥글고 환한 모습이기도 하고, 언젠가는 손톱모양도 하고, 어느 땐 약간 부풀은 모습이기도 하고, 때론 구름 속에 숨기도 한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유현(幽玄)함은 나로 하여금 절로 흥취를 자아내게 한다. 일 년 내내, 아니 십 수 년 나와 함께한 모습이지만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는 까닭은 언제나 달 스스로 새로움을 안겨주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을 살아가며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처럼 신나는 일이 있을까. 늘 걷는 오솔길의 사물은 언제나 새롭다. 길가의 나뭇가지 하나, 길섶의 마른 풀 잎 하나, 땅위의 나뭇잎 하나조차 어제의 것이 아니다. 바람 한 줄기마저 어제의 바람이 아니다. 시나브로 변하는 풍경임에도 변화를 느낄 수 있음은 나만의 행복이다. 늘 만나는 사람의 옷차림의 변화를 발견하는 일, 늘 만나는 사람에게서 느닷없는 매력을 느껴보는 일은 나를 화들짝 깨워주는 일이다.
나에게 붙어 다니는 사소한 일상이 나에게 가장 특별한 것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즐겨하는 일들에 몰두하고 즐기기 때문일 것이다. 저 보름달도 어쩌면 땅위를 비추기 위한 것이 아닌 스스로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모습으로 늘 새로움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빚어내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아름다움은 나를 끌어내는 힘이다. 나만이 즐기는 시간을 놓치지 않는 힘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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