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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따라 발길따라

대흥사 이야기

물소리~~^ 2013. 11. 21. 16:49

 

 

 

 

대흥사 전경

 

문화유산답사기를 쓰신 유홍준님은 우리나라 문화 답사 1번지로 남도를 꼽았다. 그중 두륜산을 포함한 대흥사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정말 우리나라는 국토가 박물관이라 했듯 곳곳의 명승지에는 절이 있고 그곳에서 빚어진 문화의 영향에서 우리는 결코 벗어 날 수 없는 정서를 지니며 살아왔다. 우리의 문화재 80% 이상이 불교문화재임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할 것이다. 내가 두륜산을 알고 대흥사를 익히 알고 있음은 그렇게 역사적으로 많이 회자되고 있음에 기회 되면 찾아보고 싶다는 염원을 늘 지니며 살아왔던 것 같다.

 

 

 

 

 

 

 

 

 

 

 

 

단풍을 만나러 두륜산에 왔으니 대흥사를 둘러보지 않을 수 없다. 신라 시대에 창건된 대흥사는 전각이 30여 채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큰 사찰이다. 또한 우리나라에 다도를 정립한 것으로 알려진 초의선사가 머물다 입적하여 ‘차 문화의 성지’로도 불린다. 역사적으로는 임진왜란 때 승병 총수가 되어 왜적을 물리친 서산대사, 사명당(유정), 뇌묵당(처영) 등 3선사를 기리는 사당 표충사가 함께 있는 것도 특이하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많은 유물을 간직한 사찰이기에 천천히 둘러봐야 했다. 한데 나는 또다시 시간 나누기에 급했으니 내가 아는 만큼만 둘러본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두륜산대둔사> 라고 새로이 건 현판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흥사라는 이름은 원래의 이름이 아니다. 원래의 절 이름은 한듬절 ⇒ 대듬절 ⇒대둔사로의 변천을 거치고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대둔사를 대흥사라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93년 대흥사 주변의 상가를 집단이주하면서 멀찍이 대흥사 진입로에 새로운 일주문을 세우면서 그 현판에 원래의 이름을 가져와 세웠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나의 개인적 생각으로는, 앞 일주문에 大芚寺라 했으니 안쪽에 걸려있는 大興寺라는 이름을 덮어버릴 것이다. 우선 나부터라도 대둔사라 불러야겠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단풍든 숲길이 끝날 무렵 아담한 한옥 여관을 만났다. ‘유선관’ 이다. 400여년의 전통을 가진 여관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무어든 한 뜻으로 올곧음을 지향해 나간다면 두루 길이 사랑과 관심을 받으리라.

 

 

 

부도밭

유선관 옆 피안교를 지나니 거대한 부도밭이 나온다. 내가 보아온 부도밭 중 가장 넓어 보였다.  

 

 

 

해탈문의 일주문에는 대흥사라 쓰여있었다.

부도밭을 지나 해탈문에 이르니 大興寺라 쓰인 예의 그 현판이 걸린 일주문이 보인다. 해탈문안에는 여느 사찰과 달리 사천왕상이 없다. 이는 사방으로 산들이 대흥사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풍수적으로 완벽한 형국을 취하고 있어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지 않다고 한다.  (대흥사 홈피 인용)

 

 

 

대흥사의 배경 산,  전체적인 모습이 부처님이 누워있는 모습이라하였다.

 

해탈문을 벗어나 펼쳐지는 사찰전경의 풍경은 참으로 넓고도 아늑했다. 무수한 전각들이 들어서 있었지만 흐트러짐이 아닌 안정감을 주고 있으니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둘러보고 또 둘러보았다. 앞으로 보이는 저 산의 풍경은 부처님이 누워계시는 모습이란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다 오른쪽은 부처님 얼굴이요, 가운데는 배, 왼쪽 끝은 다리 모습이란다. 어쩜 정말 !! 무어든 의미를 붙이기 나름이지만 이 대흥사 아닌 대둔사로서는 충분히 그 의미를 끌어올 수 있는 변하지 않을 풍경이었다. 누워 계시는 부처님이 계신 곳! 오늘 충분히 그 좋은 의미를 바라볼 수 있음만으로도 이곳을 찾은 보답이 되겠다.

 

 

 

오른쪽의 우람한 나무 두 그루는 연리근 이란다.

 

사찰 전체적으로 고풍스런 전각과 새로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오래된 나무들이 곳곳에 자리하면서 그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토록 한 사찰이란다. 그래서인지 화재도 없었고 그래서 나무들도 온전히 세월을 보듬고 자라고 있는 것 같았다.

 

 

 

대웅보전

 

절의 가장 중심건물답게 대웅보전의 건물은 고색이 짙었다. 유난히 눈길을 끌어가는 것은 ‘대웅보전’ 이라는 현판이었다.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추사 김정희는 그가 55세 되던 해에 제주도 귀양길에 오른다. 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러 초의 선사를 만났고 모든 면에서 기고만장했던 추사는 현판글씨를 보며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 놓은 사람의 글씨를 걸었다’ 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의 극성에 원교의 현판을 내리고 추사가 쓴 글씨를 달았다고 한다. 9년 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다시 한양으로 가던 추사는 다시 대흥사에 들렸고, 그 때 다시 현판을 원교의 것으로 바꾸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지금의 현판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라 한다.

 

추사는 자신보다 선대를 살다 간 명필의 글씨를 무시했던 그런 마음의 소유자였을까. 귀양살이 후, 다시금 현판을 바꿔 달라한 마음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9년 동안의 생활에서 무엇을 깨달았을까.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이지만 전해오는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배워야하는 가치를 지닌 역사의 현장이다.

 

 

 

윤장대

 

 

대웅보전 앞 뜨락에 개인들의 소망을 담은 촛불 함, 귀여웠다.

 

 

대웅보전의 부처님, 현판글씨를 확대했으면 좋았을 걸....

 

 

 

 

 

 

경내에 있는 연못 '무염지(無染池)'

 

 

표충사

 

또 하나 이곳 대흥사의 역사적 의의를 찾아 볼 수 있음은 표충사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왜적 격퇴에 앞장선 서산대사를 모시는 사당으로 조선 현종 10년(1669년)에 건립되었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활동한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유정, 처영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곳이다. 조선 정조12년(1778년)에 대사의 높은 공을 기리기 위해 왕이 친히 사액을 내리고, 친히 글씨를 쓴  ‘표충사(表忠祠)’ 편액과 ‘어서각(御書閣)’이란 편액 두 기가 걸려있다.

 

표충사를 만나기 전 나는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표충사의 '사'를 寺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두개의 절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실물을 보고나니 '사'는 祠 였다. 사당이었던 것이다. 의문이 걷히니 그제야 환한 마음이다.

 

곳곳에 역사의 흔적이 많은 이곳이다. 절이라는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역사적, 문화적인 가치에 비중을 두며 둘러보노라니 참 뿌듯하다. 역사의 현장을 만나고 그에 그 사실들을 인지할 때,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일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현재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호국문 (표충사 정문)

 

 

표충비각

 

 

의중당 (제물을 차리는 장소)

 

 

강례재(표충사 내)

 

 

이제 표충사 옆길을 따라 두륜산 정상을 향해 오른다. 도중에 일지암을 둘러볼 것이니 그저 마음 가벼움으로 몸마저 가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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