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조가 아름다운 웅포나루
마음의 짐에 눌려 예쁜 가을의 만남을 일찍이 접은 나를 달래주기라도 할 듯, 아침 하늘은 안개 자욱한 잔뜩 찌푸린 모습이었다. 나는 오히려 찌푸린 하늘을 위로하며 차분한 마음으로 밀린 일들을 차근차근 해 나가는데 하늘은 슬그머니 제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가을햇살이 눈부시다. 차 한 잔으로 잠시 여유로움을 즐기려는데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이 이때가 지나면 볼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노라고 알려준다. 그들은 잠시도 기다려 줄 수 없는데 나보고 시간 탓만 하고 있느냐고 책망하니 문득 솟구치는 초조함이 나를 일으킨다.
가을 햇살 타고 흐르는 바람결에 추억이 엄습한다. 며칠 전부터 입고 싶어 했던 요즈음의 들녘과 닮은 겨자 색 블라우스를 입고 디카와 손지갑만 달랑 들고 차에 올랐다. 한낮의 기온은 아직도 높았지만 늦은 오후를 스치는 바람만큼은 서늘함으로 다가온다. 시내를 조금 벗어난 풍경은 어느새 가을로 가득했다. 곳곳에서 치러지는 행사에 다녀오는 차량행렬들마저 가을색인 듯 다정하게 보이니 스치는 풍경들은 내 눈 안에 서로 먼저 들어오려고 앞 다투며 밀치고 달려든다. 다정한 그들이 보여주는 몸짓들에서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으니 가을 들녘은 거대한 연주회장이 되었다. 이 계절을 살아가는 모든 것들의 소리가 음이 되어 들려온다. 가을이 작곡한 변주곡이었다.
여리디 연한 가을바람에 온 몸을 맡기며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는 가을의 전령사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다. 곧은 음으로 날카로운 듯 선명한 음은 코스모스의 모습에 너무 잘 어울리는 음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모습에서 품어 나오는 음은 그대로 에로스의 화살이다.
약한 듯 강한 햇볕에 하얗게 온 몸을 반짝이며 낭만적인 춤사위를 보여주는 억새의 모습에서 하프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았다. 고개 숙인 모습에서 하프를 연상한 탓일까. 살짝살짝 흔들리는 고갯짓이 하프 줄을 튕기며 청아한 음을 연주하는 희고 가녀린 손의 모습처럼 보인다. 천상의 선녀가 내려와 앉아 있는 것일까.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온 산자락 끝에 아무렇게 서있는 감나무들에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달려있는 감들은 작은북을 둥둥 울리고 있으니 얼마나 귀여운 모습인지 모르겠다. 박자 한두 번 틀렸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해맑은 미소와 붉게 상기된 얼굴로 마냥 북을 두드리는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번진다. 나에게 웃음을 안겨주는 홍안의 소년들! 너무 멋지다.
아! 보랏빛 쑥부쟁이~~ 그 소녀는 아주 앳된 모습의 청순함으로 그녀보다 등치가 큰 첼로를 연주하고 있었다. 큰 첼로를 주체하지 못해 다리 사이에 세워놓고 연주하는 모습이 조금 밉상이긴 하지만 한때 격렬하게 울부짖는가 하면 느닷없이 가슴 저 밑바닥까지 울리는 저음으로 내 마음을 훑어 내리곤 하는 음색을 표현 할 때는 너마저 눈을 감더구나.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누군가가 그랬지 가을에 가장 어울리는 악기는 첼로라고… 아마도 가장 인간적인 마음을 표현해 주는 네 모습에서 기인한 말이 아닐까.
덤불 속에 살포시 피어난 구절초, 얼마나 고고한 모습인지 그만 내 가슴을 쓸어내린다. 연주회에서 콘드라베이스가 있는 듯 없는 듯싶은 모습으로 툭툭 한 번씩 던져주는 피치카토가 얼마나 멋있게 들리는지 모르는데 구절초 네 모습에서 꼭 그 음이 나오는 것 같구나. 언젠가 피치카토를 연주하는 네 손이 꼭 조막손 같아 웃음이 나왔지만 그 음이 들려주는 중후함에서 너의 기품을 느낄 수 있었단다.
내 눈을 강하게 잡아끄는 화사한 노란빛! 아. 산국이었다. 작지만 야무진 모습을 그대로 햇살에 맡기니 가을빛이 오히려 노랑 꽃빛에 여물고 있다. 알싸한 향기 가득한 모습으로 메마른 잡초 속에 서 있는 모습은 꼭 피아노 위를 날렵하게 구르는 물방울 같다. 네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을 듣고 있노라니 내 안에 있던 거친 마음들이 하나씩 정화되고 있음을 느끼는 구나. 깨끗이 정화된 마음을 안고 내 어디까지 흘러갈 수 있을 것인가. 흘러갈 수만 있다면 그 끝을 알 수 없어도 좋으리라.
마음 끝을 모르고 흐르다 확 트인 황금빛 들녘을 만난다. 아 그렇구나! 가을을 연주하는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안아주는 들녘이 있었구나. 그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음이 없어 모두 다 끌어안으며 황금빛을 발하니 가을변주곡은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있는 힘을 다해 결실을 얻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그 웅장함에 자연이 저절로 녹아들었다. 스스로의 몰입으로 빚어낸 황금빛은 가을 변주곡의 가장 진실한 동반자일 것이다.
가을햇살은 나무들의 긴 그림자를 길게 내려주며 연주회의 여운을 감미롭게 해주며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을 안겨주고 있다. 어느덧 난 낙조가 아름다운 나루에 서 있었다. 저무는 노을 속에 내 마음 한 자락 내어주고 돌아서니 아름다운 선율이 내 입가에 맴돌고 있다. 아! 가을인가, 아! 가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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