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모롱이 내리막길
늘 똑같은 형태의 일상에서 만나는 변화는 삶의 새로운 활력소가 되곤 한다. 작은 변화가 4월 초부터 내게 찾아왔다.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는 일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아이에게 아무래도 차가 필요할 듯싶었다. 하여 5월 중, 또 다른 계획이 있기까지 아이에게 차를 양보하였던 것이다. 5월 까지라는 한시적인 명목은 자전거 출퇴근이라는 부담감을 훨씬 덜어주며 마음껏 누려보자는 가벼움으로 기분 좋음을 안겨주었다.
차의 흐름이 많은 길을 피하다 보니 출발부터 오름길을 타고 올라야 한다. 늘 다니던 산 초입을 지나 에움길을 따라 도는 길이다. 아파트 주차장을 지나 오름길 마루턱까지는 천천히 자박자박 내 발걸음에 맞추어 자전거를 끌고 오른다. 그 시간만큼은 자전거도 호흡을 고르는 시간일 것이다. 오름길을 다 오르면 이제는 내리막길이다. 이때부터 내 몸을 싣고 자전거는 달리기 시작한다. 내리막길부터 시작하는 자전거 타기는 스릴이 있다. 페달 한번 밟지 않아도 자전거는 스스로 바퀴를 굴리며 나아간다. 그 순간 내 코끝에 스치는 봄의 향기는 하늘이 내게 베푼 芳香이다.
향기에 마음을 축이며 스치는 나무들에게 안녕 인사를 하면 그들은 손을 흔들며 답한다. 선사 받은 따뜻한 마음으로 산모롱이를 돌아 설 때면 보이지 않았던 새로움으로 치장한 풍경이 맞닥트리며 나를 반긴다. 모롱이를 돌아서면 알 수 없었던 그 무엇이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듯싶다. 우리 살아가는 일은 수없는 모롱이를 끼며 돌아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저쯤가면 희망이 있을 것 같아 열심히 쫓아가면 그 무언가는 사라지고 언제나 현실만 덩그마니 남아 있기 마련이다. 그 안타까움을 안고 가는 길을 멈추지 못하고 또 다른 모롱이를 돌아가는 길이 인생길이라는 것을 나를 싣고 가는 자전거는 여실히 알려주고 있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새로움이 나에게 각인 되는 것이다. 마치 책을 읽다 새로움을 알고 줄을 치듯 그렇게 하나씩 줄치며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고 알려주는 산모롱이 길이다.
산모롱이 길이 끝나면 곧장 이면 도로로 진입한다. 큰 도로를 타면 훨씬 빠르고 쉬운 길이지만 위험성도 크고 차들이 뿜어내는 매연에 썩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구획정리가 된 이면도로를 지나치며 나는 사람들의 소박함과 근면성을 만난다. 작거나 혹은 알맞게 큰 부지에 가건물을 지어놓고 각각의 간판을 달고 일하는 사람들의 부지런함과 열심인 모습에 마음이 찡해 오기도 한다.
건물 옆 공터에 개 한 마리 키우는 사람의 인정이 따사롭다. 주인에게 충실한 개는 나를 보며 짖으며 달려들기도 한다. 나는 자전거를 탔다는 안도감으로 애써 태연한 채 지나오지만 무섭기는 마찬가지다. 그 즈음 주인은 짖지 말라며 개 이름을 불러주는 마음에 나는 안도감을 느낀다. 모르는 낯선 이에게서 안도감을 느껴볼 수 있음은 자전거를 타지 않았으면 느끼지 못했을 정감이다.
한 택배회사는 이른 아침부터 바쁘다. 물건을 내리고 싣는 부산함 속의 한 여인에 나는 그만 한눈을 팔며 속도를 늦춘다. 4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 지게차를 운전하며 물건을 옮기는 것이다. 어쩜,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아마도 자신을 위해 혹은 가족을 위해 저렇게 일찍부터 열심인 모습이 싱그러웠다. 사람 사는 이치를 진실 되게 보여주는데 모자람이 없는 참 아름다운 모습이기에 그 앞을 지나칠 때마다 난 그 여인을 찾아보곤 한다. 삶은 그것을 잘 가꾸어 갈 능력이 있는 자에게는 봄꽃 같은 것이리라.
여인의 모습에 일별하고 큰 길을 건너 바로 주택가 골목길로 접어든다. 한쪽으로 자가용들이 주차 돼있어 언제나 일방통행이 되어버린 주택가 골목길의 한적함 속을 여유롭게 스치며 집집마다의 풍경을 구경할 수 있으니 이 또한 내겐 즐거움이다. 집의 크기에 차이가 있을망정 정겹게 어깨동무하고 있는 집들에는 나무나 화초가 있으니 그들 모습으로 집주인들의 취향을 유추해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앞마당이 부족한 집에서는 대문 앞에 큼지막한 함지박을 내놓고 그곳에 철쭉이며, 둥굴레, 등 화초와 채소 같은 것들을 심어 놓았다. 왠지 그런 풍경을 바라보노라면 알 수 없는 정겨움이 흐른다.
뜻밖의 사람이나 사물을 대 했을 때, 그 대상에서 어떤 정겨움이 잔뜩 묻어나올 때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지 않아 고심해본 적이 있다. 골목길을 지나며 먼 고향에 온 듯싶은 아늑함에 안온한 마음이 드는 까닭은 우리의 근본이 같음이기 때문이라고 멋 적은 말로 고심을 떨쳐 보았다. 저 풍경 속에 어쩌면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의 모습이 있을 것이고 그 모습은 곧 나의 모습일터, 한 맥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동질성을 확인 할 수 있는 골목길을 자전거로 달린다.
다소 느리지만 절대 느릴 수 없는 자전거 타는 작은 변화에서 만나는 낯선 사물과 특별한 자연 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나 개인적 감성들을 버무려 보는 시간들에 뿌듯함으로 남겨지는 자전거 출퇴근길이다. 자전거를 저어가며 연초록으로 뽐내는 5월을 마음껏 내 편으로 만들어 보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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