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 일요일,
우리 지역의 청암산을 다녀왔다.
비가 내리는 탓인지 산길은 오직 나 혼자뿐이다.
산의 최고 높이는 119m이지만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누적 고도는 462m라고 내 폰이 알려 주었다.
내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와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간혹 지저귀는 산새 소리뿐 적막하기 그지없는 산길이지만
나는 오롯한 마음을 챙길 수 있어 참으로 좋았다.
곳곳에서 단풍으로 우리의 눈과 마음을 빼앗아 가고 있는데
이 작은 산은 아직도 푸르름이 더 짙다.
하니 주위의 풍경보다는 비 머금은 숲이 전해주는 향기를 듬뿍 마시며
질펀한 산길에 행여 미끄러지기라도 할까 봐
내 눈은 계속 땅을 바라보며 걸어야 했다.
작은 오솔길은 다정했다.
갈잎으로 덮인 길이기도 하고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길이기도 했다. 진정 가을의 길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길을 바라보며 걷다가
한 구비 돌아 맞닿은 길을 만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새카만 커다란 무언가가 길을 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쿵! 놀란 마음에 그냥 우뚝 서서 결음을 내딛지 못했는데
나는 그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아니, 이게 뭐야~~”
나무뿌리가 그렇게 산길로 뻗어 있었다.
왜 이 나무의 뿌리는 땅속에 있지 않고 길 위로 나왔을까.
홀로 걷는 이 산길에 외롭지 말라고
나무는 불쑥 뿌리를 내밀며 나에게 화두를 주니
내 공상은 파문을 일으키며
내 걸음걸음을 의식하지 못하게 하고 말았다.
뿌리가 저렇게 드러난 모습을 보노라니
이제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전해온다
나무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지를 내어 무성한 잎을 피우기도 했을 것이고
꽃이 피었을 것이고, 지금쯤은 열매를 맺고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의 근본은 뿌리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인데
가지와 잎이 살랑거리는 모습과
화려한 꽃을 즐겨 바라보고,
열매만 바라보면서 그들을 아는 척했을 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만나는 최고의 순간이나
존재의 빛나는 때를 꽃이라 한다.
하지만 꽃은 혼자 우뚝한 존재가 아니다.
꽃을 피우기 위한 보이지 않는 근본이 이어지고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근본인 뿌리가 없으면
나무는 가지도 올리지 못하고 잎도 피우지 못하고
꽃과 열매도 만들지 못할진대…
뿌리가 없으면 다 무너지고 말 터인데…
한때 내 아픔의 시기를 지나면서
내가 없다면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로
잠을 이루지 못한 날들이 수두룩했다.
아직 까지는 내가 우리 아이들의 뿌리임에
굳건해야 한다며 다짐했던 그때의 어설픈 마음들이 휙휙 스쳐 지난다.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세 곶 됴코 여름 하나니……”,
비가 점점 그치고 있다. 2시간 21분을 걸었다
이제 우산도 공상도 접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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