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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기념관을 다녀오다.

물소리~~^ 2017. 5. 8. 09:17

 

 

 

 

 

 

▲ 추사 기념관

기념관은 추사의 세한도에 나오는 가옥을 본 떠 지었다고 한다.

 

▲ 세한도 / 국보 제180호

 

 

조선시대에 번성했던 제주 세 고을인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중 남서쪽의 대정현은 추사의 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이곳 역시 꼭 한 번 찾아보고 싶었던 곳인데 제주 관광단지인 서귀포와는 조금 떨어진 곳이어서인지 늘 비켜 갔던 곳이다. 모슬포항에서 가까운 곳에 추사의 적거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마라도에 다녀오면서 꼭 찾아 가리라고 일정에 끼워 놓았던 곳이다. 마라도에서 나오자마자 추사기념관으로 향했다. 하니 이번 주제는 역사라고 말 할 수 있으려나?

 

기념관의 첫 인상은 별로였다. 세한도에 나오는 서재의 모습으로 지었다곤 하지만 조금은 우중충하니 창고 같은 느낌이 먼저 들어온 것이다. 물론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다면 뜻 깊은 마음눈으로 바라볼 수 있겠지만 순간 만나는 첫 느낌은 창고 같았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자 공간은 넓은데 전시된 유물 또한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토록 많은 글씨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시간을 할애하여 둘러보고픈 마음은 없고 빨리 적거지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다. 적거지는 기념관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동선이었다.

 

 

▲ 추사의 친필 편지

 

유배지에서 추사는 날마다 편지를 기다렸고 날마다 편지를 썼다고 한다.

얼마나 외롭고 괴로웠을까.

 

 

 

 

추사는 자신이 귀양살이하던 집을 ‘귤중옥’ 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귤나무 속에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동안 추사는 3번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현재 기념관 뒤 적거지로 지정된 곳은 두 번째 귀양살이하던 집의 장소인데 주거 형태는 첫 번째 집을 편지에 의거 복원해 놓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추사는 9년간 살면서 그 유명한 세한도를 완성했을 뿐더러 그의 추사체가 완성되었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추사는 귀양살이 집을 장만하고 나서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

 ‘집은 넉넉히 몸놀림할 만 한데를 얻어 오히려 과한 듯 하오’ 라며 안심 시켰다고 한다.

 

 

 

 

 

 

 

 

 

 

 

 

 

 

▲ 돗통시

제주문화의 하나로 돼지우리와 화장실을 겸한 장소로

인분의 처리와 돼지의 사육 이외에도

육지처럼 흙이 많지도 않고 영양분도 적어 생산량이 적었던

제주의 토양력을 보완할 수 있는 거름의 생산거점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추사의 귀양살이에서 돼지를 키울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남는다.


 

▲ 추사와 초의선사

두륜산 일지암에서 거주하던 초의는 추사의 아내의 죽음 후,

추사를 위로하려 제주도에 내려와 6개월을 함께했으니~

그들의 우정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곱게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茶을 주고 받으며 추사, 다산, 초의가 나눈 우정은

몇 백년이 흘러도 맛있는 만남으로 기억되고 있다.

 

 

 

 

 

 

 

 

 

▲ 추사 적거지 뒤 사색의 길 보리밭에서의 울 아들

 

 

▲ 탱자나무 울타리

추사는 위리안치의 형을 받았는데

위리안치는 가시돋힌 탱자나무 울타리로 집의 사면을 둘러놓고

보수주인만 출입이 가능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행형제도에서 유배형이 갖는 미덕은

결과적으로 학문과 예술에 전념할 수 있는 강제적인 기회를 제공 했다는 점이다.

다산의 사상은 18년 유배생활에서 결실을 맺고

그의 ‘북어국 백반’같은 해맑은 글씨체를 보여주었듯이

추사체는 제주도 귀양살이 9년이 낳은 것이었다.

조선후기 동국진체라는 조선적인 서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는

해남 신지도에 30년 유배하면서 이룩했고

신영복 선생의 어깨동무하는 듯한 ‘연대체’는 20년 감옥살이에서 얻은 것이었으니

우리나라 명필은 다 ‘유배체’라고 할 만 하다  - 유홍준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에서 -

 

 

▲ 대정읍성에 기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