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국경일"
월말 일 처리 때문에 사무실에 혼자 나왔지만 쓸쓸하다.
요즈음 마음 둘 데 없어 더욱 그러하다
드라이브라도 할 요량으로 잠깐 나와 부여 무량사를 향했다.
차를 몰고 몰아 금강을 지나고 도 경계선을 지나 한참을 달리니 백제 땅 부여에 닿는다.
쌀쌀한 날씨는 마음마저 움츠리게 하며 차 안의 아늑함을 놓지 못하게 한다.
무량사, 부여인근에서 가장 큰 절집이라고 한다.
측정할 수 없음을 이르는 절 이름에서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를 새겨본다.
절에서 나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일주문 밖 음식점으로 우르르 들어가며 게걸스런 목소리들을 토해낸다.
진한 것을 먹고 마시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스며있는 목소리들!
절 안에서 무엇을 보고 느끼고 나왔을까.
사연을 안고 들어가 사연의 가벼움을 선사받고 나오는 가벼움일까.
휴일 이어서인지 간간히 들려오는 아이들 웃음소리와 스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백제! 이는 망한 나라가 아니던가. 삼천궁녀를 거느리던 그 화려함은
오늘의 추위처럼 을씨년스럽게 변해갈 수밖에 없음을 생각게한다.
인간의 욕망과 이루고자하는 꿈은 실패를 깊숙이 감추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니 오른편으로 넓게 펼쳐진 들에서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지난 가을에 감이 무성한 나무들을 만났는데
그 감나무들도 겨울 동안거를 하는 듯 빈 몸으로 말없이 서있다.
작은 다리를 건너 돌아서니 사천왕문이 보인다.
사천왕문을 통과할 때면 나는 늘 무서움으로 후다닥 지나간다.
두 손을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들이 오히려 무색할 지경이다.
어차피 허물로 뒤집어 쓴 나인데... 허물이 더 무서운 마음 일 것이다.
사천왕문을 벗어나니 확 트인 절 마당이 눈에 꽉 차게 들어온다.
정갈하다.
석등과 석탑과 극락전의 단정함에 조심스레 옷 매무새를 여며본다.
바람이 매서운 꽃샘추위가 몸을 자꾸 웅크리게 하였다.
모처럼 찾아간 천년고찰을 얇게 입은 옷으로 추워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부처님께서 아주 많이 서운타 하시겠다.
다음에 두 배, 세 배, 정성을 드려야겠다고 혼자 다짐하며
고즈넉한 산사를 둘러보았다. 두 번째 찾아온 무량사~
조선 최고의 건축미를 자랑함은 물론 매월당 김시습의 흔적을 만나고 싶었던
잠재된 마음이 있어 헛걸음은 아닌 것 같으니 조금은 뿌듯한 마음이다.
참 역사적 의미가 깊은 절임을 다시 한 번 새겨본다.
무량사 일주문
다듬지 않아 울퉁불퉁한 우람한 기둥과
조금은 뭉툭한 맞배지붕이 그냥 모르게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다.
'만수산무량사(萬壽山無量寺)라는 편액 오른쪽 위로
희미한 한반도문양이 함께 새겨져 있었다.
이 편액을 쓴 김찬균이라는 사람의 표시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 분은 전국의 사찰에 편액을 남긴 사람이지만 행적은 알 수 없다고 한다.
통일신라 때 창건한 무량사는 고려 고종 대 중창한 후, 임진왜란때 불에 탔다고 한다.
지금의 모습은 조선 인조시대에 중수된 건축으로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다.
외관상 2층으로 보이는데 내부에 들어서면 층이 구분되어 있지 않고 트여있다.
안의 보수공사중이라고 절 내부를 공개하지 않고
앞에 실제의 모습으로 약식 불당을 비닐천막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극락전과 오층석탑, 석등이 일렬로 배치된 일탑식 가람으로 셋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극락전의 고색창연한 문양
가려져 볼 수 없었으나 예전의 사진을 가져옴
예전에 왔을 때는 가을이 끝날 무렵이어서
느티나무의 낙엽들이 더 할 나위없는 고즈넉한 운치를 보여주었는데
오늘은 다소 황량했지만 나무들의 우람한 위용은 여전했다.
극락전 바로 옆에 ‘우화궁’ 이란 현판이 걸린 별채가 있다.
우화궁이란 글씨는 볼 때마다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부처님이 영산회에서 설법하자 하늘에서 만다라꽃비가 내렸다는 우화!
별채(우화궁)의 기둥에 설잠스님(김시습의 법명)과 진묵대사의 그 유명한 주련이 걸려있다.
하늘은 이불, 땅은 요, 산은 베개
달은 촛불, 구름은 병풍, 바다는 술독
크게 취해 거연히 춤을 추고 싶어지는데
장삼자락이 곤륜산에 걸릴까 걱정이 되네
위 사진에 보이는 주련의 뜻이다.
鐘聲半雜風聲령 (종성반잡풍성령) 종 소리는 바람 소리와 서로 섞여 서늘한데
夜色全分月色明 (야색전분월색명) 밤 경치 온전히 밝은 달빛을 나눠서 밝도다
무량사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이 많음은
금오신화로 유명한 매월당 김시습에 관한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김시습의 영정 (자화상이라 한다)
김시습은 조선 세종 때 태어나 성종 24년 에 59세로 무량사에서 일생을 마쳤다.
세 살에 글을 읽고 다섯 살에 시를 지었다는 천재!
금오산에 들어가 ‘금오신화’를 쓰고 2,200편의 시문을 남긴 글쟁이
세상을 버렸다고 하나
세상에 대한 고뇌를 떨치지 못하고 방황했던 김시습은 선승이었고 학자였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소리를 들을 만큼 총명했으며 한번 배우면 곧 익힌다하여
이름도 시습(時習)이라 지었으며 세종대왕도 자라면 크게 쓰겠다는 약조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시습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소식을 듣고
삭발하고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난다.
유랑 끝에 다다른 곳이 이곳 무량사였다고 한다.
생을 마감하며 화장을 하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3년 후에 장사를 지내려 관을 열어보니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 모습에
사람들은 부처가 되었다고 하며 화장을 하니 사리 1과가 나왔고
사리를 안치한 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그 후 태풍에 부도가 쓰러지면서 사리가 나왔는데
그 사리를 현재 부여박물관에서 보존하고 있다하니
한 사람의 곧은 정신은 후세에까지 귀감이 되는 참 좋은 교훈!
그래서 이곳을 자꾸 와 보고 싶은가 보다.
김시습의 영정이 모셔진 곳(왼쪽)과 김시습이 기거하던 청한각(오른쪽)
극락전과 다소 거리를 두고 위치한 정경이 참으로 고즈넉했다.
마음이 스르르 잦아드는 그런 아늑함을 안겨주기도 했다.
청한각 현판
가운데 한(閒)이 거꾸로 되어있음은
늘 한가롭게 누워 지낸다 하였음을 뜻했다 한다.
김시습의 부도탑
부도탑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
바람은 차가웠지만 마음만은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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