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의 글방

겨울나무의 계영배

물소리~~^ 2021. 1. 18. 22:25

 

   오늘도 눈이 내렸다.

   지난번처럼 갑자기 많이 내린 눈이라기보다는 새벽부터 소담스럽게 내리는 눈이다.

   아침 일상을 준비하면서 내 눈은 자꾸만 창밖을 기웃거린다.

   아, 오늘도 사무실까지 걸어가야지~~ 혼자만의 생각으로 마음이 동동거린다.

   나보다 일찍 나가는 남편이 운전 조심하라고 한다.

   건성으로 알았다고 대답하였다.

 

   기모 속옷을 챙겨입고 지난번에 귀가 시렸기에 귀마개도 챙겼다.

   마스크를 걸고, 귀마개를 하고, 모자를 쓰고, 핸드백 대신 백팩을 메고,

   장갑을 끼고, 롱패딩 코트를 입고, 한 손에 우산을 설산 삼아 들고 운동화를 신고 나섰다.

   눈 위에서 뒹굴어도 괜찮을 것 같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길을 걷노라니 마음이 한없이 맑아 온다

 

   눈 맞은 나무들의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

   겨울날의 서정을 가장 많이 안겨주는 것은 

   차가운 눈을 맞으면서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있는 나무들이다.

   아무리 차가운 바람일지라도, 시린 눈일지라도

   자기가 맞고 받을 만큼만 쥐고서 조용히 서 있는 모습은 그대로 아름다움이다.

 

   굵은 줄기에서부터

   아주 가녀린 가지 위에도 눈을 안고 있는 모습은 어쩌면 그렇게 정교한 모습일까.

   굵은 가지는 굵은 제 몸 위에 얹을 만큼만 눈을 받아들였고

   가녀린 가지는 그 가녀린 만큼만 눈을 얹혀놓고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서 있다.

 

   미처 제 몸 위에 얹어놓기 버거운 눈은 차라리 아래로 내려놓으며

   땅 위에 또 다른 아름다움을 만들고 있었다.

   추위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지키고자

   제 몫만큼만 챙겨 들고 있는 날씬한 모습의 나무들이 참 장하다.

 

   이런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언제나 계영배를 생각한다.

   오래전 최인호의 소설 ‘상도’를 읽었었다.

   5권이나 되는 장편의 이야기 중에 내 머리에 남아있는 것은

  “넘침을 경계하는 잔, 계영배”라는 말뿐이다.

   아마도 그만큼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 결론일 것이다.

 

   계영배는

   70% 이상 술을 채우면 모두 밑으로 흘러내리는 원리를 적용하여 만든 잔이었다.

   상도의 주인공 임상옥은 그 당시 무역권을 독점해 큰돈을 벌었지만,

   그는 계영배를 항상 간직하며 자기의 과욕이 넘치지 않도록 다스리면서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 라는 뜻을 전한다.

 

   이처럼 자신만의 계영배를 늘 지니고 살아온 듯

   나무들은 욕심을 내지 않고 자기가 감당할 만큼의 눈만 받아들이면서

   추위에서도 잘 견딜 수 있는 강한 자신을 만들고 있으니 참으로 아름답다.

 

   요즈음 집수리를 위해 매일 조금씩 집안의 짐들을 정리하는데

   왜 그렇게도 버려야 할 것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나는 살아오면서 내 마음의 계영배를 지니지 못하고 살아온 것만 같으니

   넘치기 전에 비워내는 홀가분함을 모르고 살아온 것만같다.

 

   우리가 지닌 욕심이라는 것은

   내가 지닌 것이 조금 부족하여 다른 사람들보다도

   불편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경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해결될 수 있는 마음이라고 믿는다.

 

   내가 지닌 그릇에 넘치도록 그 무엇을 채우려 하는 마음을 내려놓는다면

   내 삶의 무게가 훨씬 가벼워진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진대

   나는 늘 그것을 망각하며 살아오고 있는 것이 아닌지

   오늘 눈 내리는 날의 나무들이 나를 일깨워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