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죽은 힘이 세다
▲ 베란다에서 단풍 구경
어제는 종일
큰 아이와 친정어머님께 다녀왔다.
아이를 보고 왔어도
어머님을 뵙고 왔어도 그냥 마음이 짠하다.
우리 어머니, 내가 간다고 하면 언제부터 날 기다리시며
문 열어놓고 계실 것 같아
아이의 이것저것 챙겨주고 정리해 주고 떠날 무렵 전화를 드렸다.
세월호 때문에 1학기 동안 못했던 학교행사를
2학기 때 치르느라 바빴으며 더구나 학예회 담당이었다는데
밥 한 번, 빨래 한 번 챙겨주지 못해 아릿함이 가득한 아이,
한 번이라도 더 자주 뵙지 못해 미안한 어머니,돌아오는 길, 괜한 마음일까
내 마음은 눈물샘을 받아 죽 끓듯 걸쭉해진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마저 남은 호박을 다듬었다.
아무리 보아도 색이 참 곱다.
다듬은 호박을 일부는 지퍼백에 넣어 냉동실에 넣어두고
일부는 오늘 호박죽을 끓여봤다.
없는 솜씨 부리려니 신경 쓰이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호박을 압력솥에 물 한 컵을 붓고 쪘다.
압력솥 속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고운 색이 반감되었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진 일
다음 순서로 넘어가야 하니 이제는 감성은 금물이다.
다지기로 팡팡 두드리니 호박은 맥없이 풀어진다.
걸쭉하게 풀어진 호박에 약간의 소금과 삶아 놓은 팥을 넣고
다시 끓인 뒤. 찹쌀가루 버무림을 넣고 또 한 번 끓였다.
마지막으로 황설탕 한 수저 넣고 저어준 뒤 맛을 보니 정말 맛있다.
아, 이는 내 솜씨가 아닌
최후까지 제 할 일 다 해 낸 호박의 맛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것은 죽 한 그릇의 힘이다.
아픔으로 온 몸이 망신창이가 되었던 환자들도 죽부터 먹고 힘을 낸다.
화려한 그릇에 담긴 부잣집의 죽이 아니고
값이 비싼 전복죽은 아니지만
오늘 내가 끓인 호박죽은 세상에서 가장 맛 좋은 죽이다.
우리 앞산, 뒷산의 단풍도 이제 완연하다.
거실에 앉아 단풍구경하며 오늘은 호박죽으로
걸쭉해진 내 마음의 힘을 세워야겠다.
아니 호박죽의 힘이 나를 세워주겠지…